인도 유권자 1억3천만명 명단 삭제 논란
인도에서 1억3천만명이 넘는 유권자 이름이 선거인 명부에서 삭제된 것을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면서 선거관리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인도 Z세대가 주도하는 온라인 정치운동 단체에 야권까지 가세하면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 정부에도 정치적 부담이 커지는 모습이다.이번 논란은 지난달 인도 매체 인디언익스프레스가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자 명단 개편 과정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보도에 따르면 선관위가 유권자 명단 초안에서 수백만명의 이름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선관위원 2명이 일부 결정과 명령이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내려졌다며 개편에 반대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선관위의 명단 수정으로 삭제된 이름은 1억3천3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2천800만명,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은 6천300만명,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3천만명으로 집계됐다. 삭제 규모는 일본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준이다.
이 과정에서 야당 지지자들이 명단에서 대거 제외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따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인도국민당(BJP)이 향후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인도 선관위는 이러한 의혹을 부인했다. 선관위원들 사이의 이견은 기관 운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통상적인 일이며 부적절한 행위는 없었다는 입장이다. 또 이번 명단 수정은 중복 등록자와 사망자, 허위 등록자 등을 정리하기 위한 조치라며, 잘못 삭제된 유권자는 이름을 다시 등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선관위의 해명에도 항의는 이어졌다. 인도 Z세대 중심의 정치운동 단체인 '바퀴벌레국민당(CJP)' 소속 수천명은 지난 2일 경제 중심지인 서부 뭄바이에서 갸네시 쿠마르 선관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후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INC)를 비롯해 20여개 야당이 참여한 정치연합 인도국민발전통합연합(INDIA)도 시위에 합류했다.
INC는 쿠마르 선관위원장뿐 아니라 모디 총리와 아미트 샤 내무부 장관의 사퇴도 요구했다. 라훌 간디 전 INC 대표는 시위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며 정부를 비판했다.
시위는 지난 10일과 11일 수도 뉴델리를 중심으로 더욱 격화했다. CJP가 뉴델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자 인도 정부는 경찰관 등을 포함해 6만명을 투입했고, 수도권 일대의 경비를 강화했다. 경찰은 주요 도로 진입로에 바리케이드와 콘크리트 블록을 설치해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검문검색을 확대했다. 지하철역 45곳을 폐쇄하고 시위 예정지와 도심 일부 지역의 모바일 이동통신망도 차단했다.
인도 경찰은 지난 10일 시위와 관련해 2천400명을 연행해 구금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같은 날 밤 석방됐다고 밝혔다. 반면 CJP는 전국에서 1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체포됐다고 주장해 양측의 설명에 차이가 나타났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들도 경찰에 연행됐다. 로이터 통신은 기자증을 착용하거나 마이크를 들고 취재하던 언론인들이 연행됐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에 기반을 둔 국제 언론자유 보호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RSF)는 최소 16명의 기자가 연행됐다며 경찰 조치를 비판했다. RSF는 공익을 위한 취재는 범죄가 아니라 언론인의 업무라고 강조했다. 11일에도 뉴델리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고 뭄바이와 콜카타 등에서도 소규모 집회가 열렸다. 시위에 참여했다가 구금된 아비타 루헤자는 정부가 델리를 요새처럼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국민의 권리가 점차 제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CJP 지도부도 체포됐다. 창립자 아비지트 딥케와 공동 창립자 사우라브 다스, 대변인 아슈토시 란카 등 3명은 지난 10일 델리 공항에서 체포됐다가 다음 날 석방됐다. 이들은 향후 1년 동안 평화를 해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풀려났지만, 쿠마르 선관위원장이 사퇴할 때까지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딥케는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시위를 중단하겠다는 서약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며 다시 거리로 나서겠다고 예고했다.
CJP는 지난 5월 실업 상태인 젊은이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한 수리야 칸트 당시 대법원장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결성됐다. 이후 전국 의대 입학 자격시험인 NEET에서 문제 유출 의혹이 제기되자 교육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며 약 두 달간 시위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인도 Z세대의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2천500만명을 넘어 집권당 BJP의 1천500만명을 웃도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7월에는 CJP 시위대 수천명이 뉴델리에서 연방 의회로 행진하려다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후 시위가 동부 서벵골주와 남부 텔랑가나주 등으로 번졌고, 결국 다르멘드라 프라단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다. 모디 내각에서 대규모 시위의 압박으로 장관이 물러난 첫 사례였다. 당시 시위는 청년 실업과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도는 주요 경제국 가운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청년층의 고용 문제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15∼24세 실업률은 약 20%이며, 학사·석사 학위 소지자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모디 총리는 앞선 시위 이후 입시 준비를 위한 무료 온라인 강의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청년층 달래기에 나섰다.
외신들은 이번 선관위원장 퇴진 시위가 모디 총리의 집권 12년 동안 가장 큰 정치적 도전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가디언은 모디 정부가 반대 의견에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여왔으며, 이번처럼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하는 상황은 드물다고 지적했다. 내년에는 인구가 가장 많은 우타르프라데시주를 비롯한 주요 주에서 주의회 선거가 예정돼 있어 이번 논란이 집권당에 추가적인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유권자 명단 삭제가 실제로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는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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